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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와 공공미술의 역할

by 하루정보하나 2025. 5. 1.

공공 공간 속 예술은 단순한 장식이나 도시 미관의 개선을 넘어서, 한 사회의 정체성과 기억을 구성하는 강력한 상징 체계로 기능한다. 특히 기념비와 공공미술의 역할은 역사적 사건, 인물, 공동체의 아픔과 영광을 시각적으로 고정시키는 ‘기억의 장소’로 작동한다. 이러한 예술작품은 과거를 현재 속에 불러오며, 개인의 기억을 넘어 사회 전체의 기억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현대 사회에서 공공미술은 국가 이데올로기와 지역 정체성, 공동체 치유, 정치적 저항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며, 점점 더 복합적인 담론 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공공미술이 집단 기억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역사적 사례와 함께 알아보고자 한다.

 

 

기념비의 역사적 역할: 기억을 조형하는 조각

 

기념비는 가장 전통적인 기억의 예술 형식이다. 고대의 오벨리스크와 개선문에서부터 현대의 전쟁 추모비와 독재 피해자 기념 조형물에 이르기까지, 기념비는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시각적 응답이다. 이러한 조형물은 종종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제작되며, 국가가 기억의 서사를 어떻게 선택적으로 구축하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의 군사적 업적을 기리는 상징이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의 시각적 잔재이기도 하다. 반면,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학살 희생자 추모비’는 과거의 국가 범죄를 애도하고 반성하는 공간으로서, 기억을 통한 화해를 추구한다. 이처럼 기념비는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윤리적 입장에 따라 과거를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구조물이다.

최근에는 고정된 형태의 기념비보다, 참여적이고 열린 형태의 기억 장치가 선호되기도 한다. 예컨대, 미국의 ‘911 메모리얼’이나 광주 5·18 추모 공간은 방문자의 체험과 감정에 초점을 맞추며, 기억을 살아 있는 감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형태는 공공미술이 감정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개인의 서사가 사회적 기억으로 확장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기억의 장소와 예술: 기념비와 공공미술의 역할
기억의 장소와 예술: 기념비와 공공미술의 역할

 

공공미술과 집단 기억: 도시 풍경 속의 이야기

 

공공미술은 단순한 기념물이나 조형물을 넘어서, 거리, 광장, 공원 등 일상적 공간 속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기억을 활성화시킨다. 도시의 벽화나 설치 미술, 미디어 아트는 특정 집단의 경험이나 정체성을 시각화하며, 종종 주류 역사 서술에서 배제된 기억을 복원하는 기능을 한다.

예컨대, 멕시코의 벽화 운동는 노동자, 농민,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각적 복권이었으며, 공공장소를 민중의 기억으로 채우는 정치적 행위였다. 현대에는 블랙라이브스매터 운동이나 홍콩 시위, 우크라이나 전쟁을 주제로 한 벽화들이 세계 곳곳의 도시에 등장하고 있으며, 이는 권력에 의해 삭제되거나 왜곡된 기억을 되살리려는 시도이자 저항의 예술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공공미술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변화할 수 있으며, 때로는 격렬한 사회적 논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조형물이 세워진 장소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가 아니라, 집단 정체성과 감정, 갈등이 교차하는 심리적 장소로 기능하게 된다. 이는 공공미술이 단지 ‘보는 것’을 넘어서 ‘기억하고 느끼는 것’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지역 주민의 기억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장소에 대한 애착과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공공미술의 윤리와 미학: 누구를 위한 기억인가

 

공공미술이 집단 기억의 매개가 된다는 점에서, ‘누구의 기억이 공공 공간에 새겨지는가’는 중요한 윤리적 질문이 된다. 어떤 기억은 기념되고, 어떤 기억은 지워진다. 따라서 공공미술은 단지 예술적 창작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특히 식민주의나 인종차별, 젠더 폭력과 관련된 조형물의 철거 요구는 현대 사회에서 공공미술을 둘러싼 첨예한 논쟁을 불러온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노예무역에 연루된 인물의 동상이 철거되었고, 미국 남부에서는 남북전쟁 당시 남군 장군의 동상을 두고 격렬한 사회적 논의가 벌어졌다. 이처럼 공공미술은 더 이상 고정된 기억의 표상이 아니라, 사회적 재협상의 장이 되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의 기억 예술은 점점 더 ‘참여적’, ‘대화적’, ‘유동적’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특정한 결론을 강요하기보다는, 다양한 해석과 기억의 층위를 담아낼 수 있는 열린 구조를 선호한다. 또한, 지역 주민이나 커뮤니티가 직접 참여하는 방식의 공공 프로젝트가 늘어나면서, 기억의 소유권에 대한 문제도 재조명되고 있다. 공공미술은 이제 단지 공간에 존재하는 예술이 아니라, 공동체 내 담론과 실천의 장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기념비와 공공미술은 더 이상 단순한 장식이나 시각적 기호가 아니다. 그것들은 한 사회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현재를 어떻게 정당화하며, 미래를 어떻게 형상화하고자 하는지를 반영하는 ‘기억의 장치’다. 이 예술적 장치는 정치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층위를 함께 가지고 있으며,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에 깊이 관여한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를 기념하고 기억하는 방식이 단일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공공미술은 고정된 기념비가 아니라, 변화 가능성과 대화 가능성을 품은 예술로 나아가야 한다. 누구의 기억을 새기고, 어떤 감정을 환기하며, 어떤 역사를 남길 것인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예술은 언제나 가장 강력한 언어로 응답해 왔다. 공공미술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면서도, 우리가 누구였고, 누구이며, 또 누구로 남고자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거울이자 목소리다.